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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밀을 채밀하고 > 살며 생각하며

저밀을 채밀하고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07-04-25 17:26:57
조회수
1,260

글제목 : 저밀을 채밀하고
글쓴이 김동신
E-mail
등록일자 2004-10-18
조회수 38

작성자. 벌집아씨        

5.9 일

그동안 겨울 먹이로 주었던것과 봄에 꿀이 들어오기전에 벌들을 키우기위해
주었던 먹이들이 남아 벌들이 꼭꼭 저장해둔것을 이틀동안 빼앗아 채밀했다.
그래야만 100%짜리 꿀을 딸수가 있기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창고에 채밀기 준비하고 3층벌통을 올렸다 내렸다하며 먹이가 저장되어있는 소비를 찾아
올봄에 새로 장만한 채밀기도 실험할겸 꿀을 채밀하기 시작
역시 자동이라 편리하긴하다.

예전엔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돌려야만 했던 채밀기가
이젠 전기나 차의 밧데리를 이용해 돌릴수있으니 전기가 안들어가는 지역도
쉽게 채밀을 할수있다.
진작에 저런것이 나왔다면 지금 내팔이 이렇게 울퉁불퉁 알이 생기진 않았을텐데...

꿀 따는것이 힘은 들어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그 꿀을 따기위해 1년동안 자그마한 벌을 온 정성을 다해서 키워왔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하지만 저밀 채밀하는것은 별 재미가 없다.
그런탓인지 아카시아꿀을 채밀할때는 조금이라도 흘릴까봐 신경을 쓰는데
다시 벌에게 줄 저 저밀들은 신경이 훨씬 덜 쓰인다.
그런탓에 울 신랑 두번이나 창고바닥에 꿀 흘리는 사건발생

경상도 지역에 꿀이 안들어와 비상상태란 소식이 연신 들려오는데
그래도 이곳은 많은량은 아니어도 조금씩 유밀이 되어 도봉기는 없다.
이틀동안 저밀채밀한후 비 그치면 바로 유성으로 떠나기위해
오늘 구소비 꺼내고 새 소비로 바꾸어놓고 로얄제리틀 조립해놓고
울 신랑은 벌통을 고정시킬 끈을 준비해놓았다.

경상도지역 꿀이 채밀되지 않아 2차지역으로들 다시 이동했다는데,
우린 이곳이 2차지역이니 조금은 편하다.
비가 그치고 해가뜨니 벌들은 시장바닥보다 더 시끄러울정도로 꿀을 가저오기에
정신이 없고, 우리는 이동할 준비에 정신이 없다.
제발 기온이 바뀌어 남은 지역에서나 모든 양봉인들이 풍밀의 기분을 느껴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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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아씨

2004-11-03
|
21회 영농,생활수기 공모에 응모한 각시글 2004.5.14

제21회 영농·생활수기 공모
농민신문사는 제21회 영농·생활수기 작품을 공모합니다. 농업인과 농가주부 독자 여러분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 영농수기

●응모자격 : 농업인
● 응모 내용 : △땀과 지혜로 선진 영농기법을 도입한 내용 △과학적인 새 농업기술, 합리적인 농산물 판매전략으로 높은 소득을 올린 내용 △남다른 영농기법으로 농산물 수입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응해나가는 내용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마을을 선진·복지농촌으로 이끈 내용 등
●원고 분량 : 200자 원고지 30매 안팎
● 선정 편수 및 원고료 : △당선작 1편, 200만원 △가작 2편, 각 50만원 △입선작 3편, 각 30만원 △장려상 10편, 기념품 증정


*생활수기

●응모자격 : 농가주부·여성농업인
● 응모 내용 :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가꿔나가는 내용 △근검·절약 등 생활의 지혜로 알뜰살림을 꾸려나가는 내용 △헌신적인 봉사로 마을 부녀자들을 선도, 생활 향상에 이바지한 내용 △자기계발에 힘써 보람있는 농촌생활을 영위하는 내용 등
●원고 분량 : 200자 원고지 30매 안팎
● 선정 편수 및 원고료 : △당선작 1편, 200만원 △가작 2편, 각 50만원 △입선작 3편, 각 30만원 △장려상 10편, 기념품 증정

※ 모집 기간 : 2004년 2월13~3월30일(우편은 마감일 소인 유효)

※입상작 발표 : 2004년 5월10일자 농민신문

※ 보내실 곳 :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36번지 농민신문사 생활문화부 영농·생활수기 담당자 앞(우편번호 110-764)

※ 기 타 : △응모작품 내용은 사실이어야 하며 전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어야 함 △작품은 반환하지 않으며 입상작에 대한 권리는 농민신문사에 귀속됨 △작품 끝에 응모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를 정확히 기재하고 겉봉에 ‘영농수기(또는 생활수기)응모 작품’이라 적어야 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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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응모작입니다.
영농수기와 생활수기 중에 생활수기로 응모했고
물론 제가 쬐끔 손을 봐줬지요.
2등에 당첨? 되었군요~

제목: 돈많고 인물좋고 성격까지 좋다던 신랑

오늘처럼 따스한 15년전의 어느 봄날
아는 언니의 소개로 인물좋고 돈많고 성격까지 좋다는 지금의 신랑을 만났습니다
시골에서 꿀벌을 기르지만 돈도 많이 벌어놓았고 힘든일은 종업원들이 한다는 언니의 귀띔이었지요.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아무 거리낌없이 엎드려 마시는 그에게 추운 겨울을 이기고 나온 버들강아지 한가지를 꺾어 그의 트럭에 꽂아준 것이 우리들의 인연이 되었습니다.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보인다며 밀어주던 엄마와 달리 아빠는 양봉쟁이랑 결혼하면 평생고생이라고 반대하셨지만 아빠의 고집을 꺾고 결혼하여 신랑이 사는 정읍으로 내려와 새살림을 시작하였지요

결혼을 하고 나서야 그 남자는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에 만오천원의 월세로 살고있는 빈털터리란 것을 알고나니 아빠의 말을 듣지않은 것이 후회도 되었지만 그래도 희망에 부푼가슴을 안고 우리는 꿀을 뜨러 가기위해 벌과 함께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동양봉이란 직업이 얼마나 힘드는지 말로다 표현할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그저 겉모습만 보고 하는 말이 여행하면서 일을 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합니다.
벌을 싣고 가기위해 부른 어느 트럭의 운전기사는 아카시아가 만개한 산을 바라보면서 꽃향기에 취했는지 정말 좋은 직업이라며 자기도 꿀벌을 기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끝내고 가면서 하는말은 “정말 몹쓸 직업이 이것이네요” 하고 바뀌더군요

남부지방의 아카시아 꽃이 질 때쯤이면 이제 꽃이 피기 시작하는 중부지방으로 옮기고 중부지방의 꽃이 질 때쯤이면 강원도쪽 으로 옮겨 꿀을 뜨는데 한곳에서 불과 1주일 밖에 머물지 않습니다.
꿀 뜨랴 다음자리 답사하랴 꿀 뜬 것 집에 갖다놓으랴 이동하랴...정말 눈코뜰새없이 바쁜 날의 연속이고 더구나 이동은 벌들이 다 들어온 밤에만 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들지요.
해가 지자마자 벌통과 살림살이들을 싣기 시작하여 다 싣고 나면 밤 9~10시
저녁 내내 달려 목적지에 도착해 벌들을 내려놓고 나면 훤히 동이 트기 시작하고 부랴부랴 숙식을 해결할 천막을 쳐야합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우고 나면 파김치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그렇다고 포기할수도 없으니 아카시아꽃이 필때가 우리의 추수철이기 때문이지요

그해 이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신랑은 몇 년후 서울로 올라가 산다는 약속은 뒷전이고 땅을 사자고 합니다.
결혼할 당시 절대 혼수를 해오지 말라던 신랑 때문에 조금의 여유돈이 있었고 그돈으로 땅을 장만하자는 것이었지요. 그날부터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꿀벌을 기르려면 마당이 넓어야 하니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현재 살고 있는 터 500여 평을 살수 있었습니다. 우린 그 땅에다 블록으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경험이 있는 마을청년은 벽을 쌓고 신랑과 나는 뒷일을 해주는 것이 힘들었지만 우리 집을 짓는다는 욕심에 첫애를 가진 남산만한 배를 하고 블록을 날라다 주면서도 기쁘기만 했습니다. 결혼 후 첫 추석인데도 이사하느라 시댁이며 친정도 못갔지만 우리땅에 나의집을 짓고 마당에 벌통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 땅이 생겨 신이난 신랑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쓸 돈도 없는데 나무만 사느냐고 하는 나에게 심어만 놓으면 저절로 크고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열매를 맺으니 나무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느냐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마당이 너무 질어 불편하다며 사이사이에 잔디도 심었습니다.

다음해에도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가진 돈은 전부 땅을 사는데 썼고 집을 짓는 돈은 시동생에게 빌렸기 때문에 돈이 궁한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내장산 도로변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사를 하기로 했지요
꿀 차며 커피 단감에 파전에 동동주까지 팔았는데 관광객들은 주변장사꾼들의 얼굴을 훑어보고 우리에게 오면서, 인상도 좋고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남매냐고 묻습니다.
부부라고 하니 정말 많이 닮았다며 열심히 살라 용기를 주시는 분이 많더군요.

그렇게 해서 빚을 갚고 조금 숨을 돌리는가 했더니 또 한번의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신랑이 총각때부터 앓았다는 디스크가 재발한 것 같다며 힘들어하더니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다리에 마비가 온다며 수술을 하기위해 입원을 한 것입니다
정읍의 병원에서 수술날짜를 잡았지만 둘째의 출산일과 겹칠 것 같아 친정이 있는 성남으로 병원을 옮기기로 하고 의사선생님께 말씀드리니 마침 잘 아는 선생님이 계신다며 소개장을 써주어 성남의 대학병원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가는 중에도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으면 도로변에 있는 꽃을 찾아온 꿀벌을 잡아 아픈 곳에 맞고 진통을 시키면서 무사히 도착 입원하였고 진찰을 해보신 담당 선생님은 며칠만 더 늦었으면 불구가 되었을 거라고 하십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이제는 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출산 예정일을 보름이나 넘기니 의사선생님들까지 빨리 애 안 낳고 뭐하느냐며 농담을 하시다가 큰일 나겠다며 산부인과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산부인과에선 빨리 수술을 해야한다며 당장 입원하라고 했지만 그때 우리는 신랑 병원비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기에 앞당겨 퇴원을 서둘렀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안된다고 하시면서도 양봉농가들의 사정을 잘안다며 입원서류에 친척인 것으로 하여 병원비가 적게 나오도록 조치해주시더군요
뱃속에 둘째는 효녀가 되려는지 집에 돌아온 다음날에야 세상에 나왔고 신랑의 허리디스크는 완치되어 우리는 큰 근심을 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그전에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기만 하던 신랑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려고 하여 골치가 아팠습니다.
양봉 후계자로 선정되어 자금이 나오니 농사를 짓는다며 논을 샀습니다.
자연농업 이란 것을 배우고 와서는 아카시아 꽃 이며 미나리며 쑥 등을 뜯어다가 설탕과 함께 항아리에 담고 퇴비며 미생물을 만든다고 흙을 퍼 날랐습니다.
이것저것 너무 많고 힘들었지만 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신랑이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한쪽 논은 벼를 심고 다른 논은 돌덩이 같은 흙을 부숴가며 고추를 심었습니다
5살 밖에 안 된 막내는 맨 날 엄마아빠가 일하는 논가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지만 놓아두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울다가 조용하기에 가보았더니 논두렁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더군요 환경에 따라 아이들도 그렇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사일이 힘든지 얼굴이 새카맣게 타고 바짝 마른 신랑은 저녁밥 먹기가 무섭게 코를 골고 자더니 새벽부터 일어나 논으로 가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한 시간도 더 지난 다음에야 들어와 다시 잠을 잡니다.
다음날 아침 어젯밤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물으니 새벽인줄알고 논으로 가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훤해지지 않아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밖에 안 되었더랍니다. 파종한 벼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 달려간 것이지요.

그렇게 지은 농사였지만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해보니 벼농사는 다른 사람들의 3분의 1밖에 수확이 안되었고, 그해따라 장마가 길어 고추는 900평에서 단 1근을 수확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초보농부가 농약과 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의욕만 앞서 밭에 심는 고추를 논에 심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지요.
농사는 그렇게 대실패로 끝났고 약한 몸을 가지고 너무 힘들게 일한 탓인지 이번엔 내가 허리를 삐끗하여 업혀서 병원에 가는 둥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하자 우리는 농사를 포기하고 다시 벌에만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패물이며 아이들의 반지를 판 돈으로 모자라는 벌을 사고 다음해부터는 오로지 양봉에만 매달렸습니다.
벌을 키우니 조금은 시간의 여유가 생겨 아이들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고 그동안 주지 못한 사랑을 쏟아 줄 수 있었습니다.
나무도 감정이 있고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더니 큰아들인 정우는 유치원에 다녀오면 낑낑거리며 나무에게 물을 주고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유치원에서 기르는 화분의 식물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더니 자기 것이 가장 잘 자란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1998년 가을,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신랑은 서울로 올라가 벼르던 컴퓨터를 샀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배우기위해 수원에 있는 한국 농림수산 정보센타로 달려가 교육을 받고 왔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타자를 배운다고 또닥거리는 신랑 때문에 새벽잠을 못 잔다며 싸움도 했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성격을 아는지라 상고출신인 내가 손동작이며 타자치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배운 신랑은 피시통신을 시작하고 affis에 가입하여 전국의 농민들과 교류를 하더군요. 그러나 컴퓨터를 구입한지 1년이 넘도록 난 별로 배울 엄두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7살 막내놈이 게임을 못하게하는 저에게 입을 삐쭉거리며,“엄만 컴퓨터도 못키면서....”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무능한 엄마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도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도 난 글을 써서 올리는 신랑을 보면서 신기하기만 했고 혼자서는 컴퓨터를 망가뜨릴까봐 겁이나 마우스만 만지작거려야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되자 신랑은 아카시아 철이 되어 사람을 구해 이동을 했고, 전 집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보고 신랑이 하던 것을 생각하며 피시통신 affis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저런 글을 보니 재미가 있고 그러다가 나도 글을 하나 써서 올려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노트에 먼저 대충 적은다음 옮겨서 올렸습니다.
올린 글의 조회수가 올라 갈 때마다 어찌나 기쁘던지요.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있었습니다.
이동중인 신랑은 pc방에서 접속해 저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피시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갈 즈음 신랑은 홈페이지를 만들어 직거래를 늘려야겠다며 이리저리 알아보기 시작했고 저는 항상 저보다 앞서가는 신랑이었기에 이번엔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홈페이지를 만들겠다고 affis 게시판에 공언해놓고서는 책을 사다가 온 가족이 같이 배우기 시작 했습니다.
농민동호회에서 만난 충북 청원군청의 계장님을 통하여 그곳에서 홈페이지 만들기 교육이 있다기에 청원군까지 3일을 왕복하며 교육을 받는 등 드디어 신랑은 홈페이지를 완성하여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이때가 2001년 3월 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전 홈페이지만 만들어 놓으면 고객들이 몰려오는 줄 알았다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크게 실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홈페이지 관리를 잘하려면 글을 자주 올려야하기에 학교 다니면서 독후감 한번 써본 적 없고 글 잘 쓴다는 칭찬한번 들은 적 없지만 그때부터 하루하루의 생활을 홈페이지에 올리기 시작하니 어느 날부터 인가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전 너무 기뻐 부지런히 답 글을 달며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신랑은 그 당시에는 꽤 비쌌던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여 직접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로얄제리 생산과정’과 ‘맛으로 좋은 꿀 구별하는 법’등의 차별화된 정보를 올리고 고품질의 상품만을 자신 있게 판매하다보니 서서히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한번 고객들은 단골이 되어 점점 판매가 늘어났습니다. 배송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오후에 상품을 주문해도 다음날 오전에 배달된 것을 보고 모두 놀라와 했습니다.
우리가 생산하는 것 중, 로얄제리는 얼음을 채워 보내야했기에 택배회사와 계약을 할 때 오후 늦게 와서 가져가도록 했기에 가능했지요.
처음엔 고가의 로얄제리를 주문하며 상할 것을 염려하던 고객들도 막상 받고나서는 얼음이 거의 녹지 않았다며 좋아들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터넷을 통한 직거래로 자리가 잡히자 신랑은 또 다른 것을 꿈꾸었습니다. 앞으로는 농민들도 자기가 생산한 농축산물을 직접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며 그동안 연구해온 양봉산물을 이용한 식품제조 허가를 받겠다고 합니다. 고심 끝에 새집을 짓기로 하였고 2층으로 지어 아래층에 공장을 차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말 우리는 그토록 염원하던 새집, 2층엔 우리가 살 집을 올렸고 아래층은 공장으로 허가를 받아 “두승산 식품”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친것입니다
올가을이면 우리가 만든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신랑하나 믿고 낯선 정읍에 내려와 정신없이 살았던 지난 14년
이제야 돌아보니 그리 실패의 삶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처음 시작 할 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지만 이제는 가진 것이 더 많으니까요
질척이던 마당은 파 아란 잔디밭으로 바뀌었고 우람하게 자란 나무들은 꽃이 피어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물론 더운 여름엔 시원한 그늘이 되어 마치 공원을 연상케 합니다. 계절마다,살구,자두,앵두,대추,감등의 열매를 우리에게 안겨주며 아침이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어 우리의 잠을 깨워줍니다
어느덧 중학교 2학년이 된 큰아들 정우와 이 엄마를 꼭 빼 닮은 초등학교 6학년의 딸, 말썽꾸러기 막내, 그리고 빈털터리였지만 항상 노력하는 고집쟁이 신랑이 있기에.......
이제는 그동안 겪어온 많은 경험들을 조금이라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지금껏 우리와 같이 해온 부지런한 꿀벌들과 함께 남은 시간도 열심히 살 것 입니다. 속아서 한 결혼도 때로는 괜찮은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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